발람과 발락

 

 

민 22:21~35

  

서울 주민들의 각종 풍습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서울민속대관" 가운데 서울에서 유행하는 갖가지 점의 종류와 점구의 변천을 소개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서울시가 19930401 발간한 "서울민속대관" 제 3, 4, 5권 가운데 경희대 김태곤 교수가 집필한 [점복신앙편]은 지역별로 선정한 26명의 생존 점복자(점쟁이)의 점치는 요령을 상세히 설명한다.

서울 동대문구 면목2동의 길춘자(56, 여)씨는 손님이 오면 점상 위에 담뱃불을 붙여두고 점을 치는 게 특징이다. 손님과의 이야기 도중 자신의 목이 굵어지고, 온 몸의 털이 일어나며, 배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데 편안하거나 통증이 오는 등 상태에 따라 손님의 운세를 점친다.

마포구 대흥동의 이영(41)씨는 엽전과 쌀을 이용해 점을 친다. 열 두 개의 엽전에 자기 나름대로 약속을 걸고 엽전을 던져 결과를 보고 손님에게 이것저것을 묻는 형식이다. 손님의 반응에 따라 쌀점을 칠 경우는 손으로 쌀을 집어서 나온 쌀알의 숫자가 짝이면 길하고, 홀이면 흉하다는 기본 공식을 따른다.

노원구 중계동의 송순천(44, 여)씨는 신내림을 받아 점을 치는 신점으로 점치러 오는 손님이 어깨가 아플 경우 손님이 오기 전부터 송씨의 어깨가 끊어지게 아프다는 것이다. 송씨의 사례를 연구한 조사자는 이런 실례를 조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말한다.

김교수에 따르면 점구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과거에는 윷점이 성행했으나 이제는 퇴조했고, 엽전을 사용하던 것이 요즘의 동전으로, 때로는 외국의 주화가 쓰이기도 한다. 점책 역시 과거에는 손으로 베낀 필사본이 주로 쓰였으나 요즘은 인쇄된 책이 사용되고 있으며, 신통도 대량 생산에 가능해져 나무로 깎아 만든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이나 철제가 보급됐다. 워드프로세서로 점괘를 뽑아 주는가 하면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밝은 사무실로 바뀌는 추세이다(한겨레 19930402).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스라엘과 아모리와의 전쟁에 대하여 이미 모압의 왕 발락이 듣고 있었다. 발락은 자기의 군사보다 이스라엘 군사가 훨씬 많다는 사실로 인하여 두려움에 빠졌다.

당시 국가간 전쟁은 곧 신들의 전쟁이었다. 아모리와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겼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아모리의 신을 이겼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발락이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네들의 신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곧 그들의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하는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할 사람으로는 발람이 선택되었다. 발람이 빌어주는 축복과 저주가 그대로 임할 것을 믿는 것이다.

발락의 명을 받은 장로들이 발람에게 예물을 가지고 찾아갔다. 그리고는 발락의 명을 그대로 전하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발람은 하나님께 응답을 얻기 위하여 하루의 시간을 요청하였다.

하나님은 찾아온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발람은 발락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할 것을 요청한다고 대답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고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하셨다(22:12). 아예 그런 생각을 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장로들에게 전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돌아갔던 장로들은 더 많은 예물들과 더 높은 사람들로 바뀌어 발람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벼슬자리를 주겠다는 약속까지 전해주었다. 발람은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역시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시간으로 하룻밤을 요청한다. 이것은 물질과 출세에 마음 약한 발람임을 증명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택하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았다면 그 즉시 발락의 사람들을 쫓아냈어야 한다. 발락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를 머무르게 하였다는 것은, 보내준 예물과 조건이 발람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죄가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내가 행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즉시 잘라내야 한다. 아무리 큰 아픔이 있고, 많은 것을 잃는다 하여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죄를 잘라내는 것이다.

두 사나이가 돈벌이를 위해 고향을 떠났다. 한참을 걷다가 산더미처럼 쌓인 마(麻)를 발견하였다. 두 사람은 얼씨구나 하고는 제각기 지게 가득히 실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번에는 금더미를 발견하였다. 한 사나이는 지게에서 삼을 내려놓고 그 대신에 금을 실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그대로 삼을 지고 갔다. 금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이를 답답하게 여긴 사나이가 "어리석은 사람아, 금이 삼보다 얼마나 더 값진 건데, 삼을 버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또 다른 사나이는 "지금까지 고생하여 여기까지 지고 온 물건을 아까워서 어떻게 버릴 수 있느냐?"고 대답했다. 어느 불전(佛典)에 나오는 우화이다.

좋은 게 무엇인지 알았다면 갖고 있던 나쁜 것은 즉각 버려야 한다. 정말로 그가 잘 살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갖고 있던 나쁜 것을 버려야만 새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나이는 너무나 어리석었다. 이제껏 고생하며 지녀온 것을 금방 좋은 것이 나타났다 하여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 생활하는 이들 가운데 많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하여 긴 경주를 시작하였다. 신앙 생활을 하다 보니 자기가 알고 지내던 것이 "죄"라 일컫는 것들이 많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도저히 필요치 않은 것들이 많다. 그러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버려야 한다.

감리교와 방송국과 문제가 생겼다. 모 프로그램에서 감리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 다룬 것이다. 담당 PD를 한 목사님이 찾아갔다. 목사님 차를 타고 저녁을 먹으러 갈 장소로 옮기자고 했다. 담당 PD가 깜짝 놀랐다. 제법 연세가 있으신 목사님인데도 불구하고 차는 겨우 아토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던 PD는 목사님의 의견대로 일처리를 하기로 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 문제가 생기면 봉투를 들고 온단다. 그런데 목사님은 일의 정당한 처리 과정에만 논할 뿐, 돈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담당 PD의 마음을 움직였다.

교회는 세상의 방법과 달라야 한다. 모두가 긍정하는 방법이라 하여 그것이 교회에서도 똑같이 통용될 수는 없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민주주의자들이 아니다. 민주주의 표결이 교회의 원칙일 수는 없다.

고라가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 받은 자임을 강조하며 모세를 몰아내려 할 때 모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것밖에 없다. 고라와 연합하여 드러나게 모세를 반대한 사람은 꽤나 사람들에게 유명한 250명이었다. 나머지 대다수는 침묵 내지 방관이었다. 숫자적으로 본다면 모세가 훨씬 불리했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다면 모세는 이스라엘 앞에서 물러났어야 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수의 의견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셨다는 증거 앞에서는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숫자만 중요시 여기는 행위는 교회에서 가장 잘못 저질러지는 세상의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은 사라지기 일쑤이다.

결국 발람은 발락에게로 가기로 했다. 일만 잘 된다면 그의 평생이 보장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귀가 주인 발람을 태우고 가다가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발람을 치기 위하여 서있는 것을 보았다. 나귀는 깜짝 놀라 길에서 비켜 밭으로 들어갔다.

발람은 나귀가 길을 잘못 들었다 하여 나귀를 때렸다. 그 곳은 포도원의 사잇길로 매우 좁은 길이었고, 좌우에는 담이 있었다. 그 길목을 하나님의 사자가 지키고 있었다. 나귀는 이것을 보고 사자를 피하기 위하여 담벽에 몸을 비비며 빠져나가려 애를 썼고, 그 위에 타고 잇던 발람은 발을 상하게 되었다. 발람은 화가 나서 다시 나귀에게 채찍질을 하였다.

하나님의 사자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것을 본 나귀가 발람의 밑에 넙죽 엎드렸다. 화가 난 발람은 지팡이를 들어 나귀를 때렸다.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셨다. "왜 나를 세 번이나 때립니까?" 발람이 대답했다.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너를 죽였을 것이다!" 나귀가 말했다. "저야말로 오늘까지 어른께서 늘 타시던 어른의 나귀가 아닙니까? 제가 언제 이처럼 버릇없이 군 적이 있나요?" 발람이 대답하였다. "없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열어주셨다. 그래서 칼을 들고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되었다. 선지자 발람은 나귀도 보는 천사를 보지 못할 정도로 영이 타락했다.

 

  

발람이 온다는 소식을 발락에게 큰 기쁨과 기대를 주었다. 발락의 행동에서 알 수 있다. 국경선까지 좇아와서 얼마나 환대를 하는가. 지난번에도 사자를 보내었는데 왜 이제 오느냐며 발람을 탓한다. 발람은 하나님이 입에 넣어주시는 말씀만 전하겠다는 대답만 한다.

급하기는 급했나 보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발락은 발람을 데리고 바알 산당으로 갔다. 거기에서 발람은 이스라엘 진의 끝 부분만을 보았다. 앞부분을 보면 저주하지 못할까 싶은 조치이다.

발람은 제단 일곱을 만들고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제물로 드렸다. 발람은 발락에게 제물 곁에 서 있도록 하고, 자신은 따로 하나님을 만나러 갔다.

잠시 후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자신이 저주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여느 민족과는 분명 다르며, 자신이 하여야 할 말을 하고 있으며, 정직한 사람이 죽듯이 자신의 마지막도 그러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발락은 깜짝 놀랐다. 발람의 말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기 때문이다. 발람은 자신에게 넣어주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한다고 다시 확인한다.

혹시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보이기 때문에 저주를 못하는가 싶어 다른 장소로 발람을 데리고 갔다. 발람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며 변덕 부리는 분이 아님을 말한다. 역시 이스라엘에게서 허물을 찾을 수 없고, 결국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화가 난 발락은 발람에게 저주도 말고 축복도 말라고 한다. 발람의 대답은 같다. 하나님께서 입에 넣어주신 것만을 말한다는 것이다.

발락이 발람에게 함께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하였다. 마지막으로 발람에게 저주를 부탁하기 위해서이다. 발람의 예언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영이 발람에게 임하였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미래가 아름다울 것과 아무도 대적할 수 없으며, 이스라엘에게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를 비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을 예언했다.

발락은 화가 났다. 발람이 어느 때보다 많은 축복을 이스라엘에게 베풀었기 때문이다. 발람을 쫓아내려 하자, 발람은 오히려 주변 국가들이 멸망할 것을 예언한다. 그리고 서로 급히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하나님의 이름이 결코 망령된 곳에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길 수 없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 "또한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는 것과 같이, 너희가 이 곳에 이를 때까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줄곧 너희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광야에서 직접 보았다. 하였다."(신 1:31)

발람이라는 말은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라는 의미이다. 물질과 출세에 눈 먼 발람의 행동을 성경에서는 미친 짓이라고 규정한다(벧후 2:16).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온전히 돌아서지를 못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행음하도록 유혹하였고, 이스라엘은 결국 타락의 길에 들어선다. 모세는 즉각 쳐들어가 발람까지도 죽인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잠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만족한 어리석은 사람의 최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