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나사로

 

 

눅 16:18~31

1. 나사로와 부자는 각각 죽어 어디로 갔습니까? (22)

거지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큰 대조를 보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부자다. 매일 잔치를 열 수 있고, 시간마다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큰 부자이다. 세상적으로 보아 전혀 부족할 것이 없다. 하루에 1억원 이상을 쓰며 세계를 돌아다니는 자매 이야기가 나왔다. 그 주변에는 관심을 끌려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고 있다.

그의 집 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다. 그는 병들었다. 고름이 터져 흘러내릴 때 옆에 있던 개가 핥아먹는다. 그는 배고프다. 부자 집에서 나오는 음식으로만 그의 생명을 영위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것은 아니다. 부자가 남는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기 직전, 또는 버린 후에 나사로가 그것을 주워먹는다. 하루 이틀 상간에 생긴 일이 아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사로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된 일이다.

악어새, 악어가 음식을 먹을 때 이빨이 그 음식 찌꺼기가 끼여있게 되는데, 그때 이빨 사이의 음식 찌꺼기를 이 악어새가 쪼아먹게 된다. 그래서 악어새는 살고, 악어는 이빨의 시원함을 얻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붙잡아주며 사는 관계이다.

불행히도 부자와 나사로는 이 관계도 되지 않는다. 서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부자에게 있어서 나사로는 자신의 위상을 하락시키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고, 나사로는 부자를 향하여 손을 벌려야만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각각 죽게 되었다. 나사로라는 사람이 어떠한 생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가 죽었을 때 천사가 영접하였다는 기록만 보고서 추측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천국을 가리키는 말로써, 아브라함의 친구가 되어 그곳에 함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그들의 조상, 아버지이다. 죽어 그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반대로 부자는 죽어 음부로 갔다. 거기는 인간들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이 있는 곳이다. 부자는 자기 있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을 본다. 그것이 더 큰 고통이리라. 세상에서 부러울 것 하나 없이 살던 사람이 지옥에 가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전도를 한다. 아직은 아니라는 대답만 들었다. 다시 말을 한다. 사람이 죽어서 돌아갈 곳은 준비가 되어 있어야죠. 그렇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돌아갈 곳을 마련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2. 부자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무엇이라 부르고 있습니까?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데라에게는 아들 셋이 있다. 고향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막내 하란이 갈대아 우르에서 죽자 데라는 나머지 아들 둘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가나안이 아닌 하란이다. 데라가 하란을 잃은(죽은) 곳의 지명을 하란으로 명명한 것 같다. 며느리 둘과 더불어 출발한 길은 가나안이 아닌 하란에서 멈추었다.

아비 데라가 죽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았다. 가나안으로 가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오직 아들을 주리라는 약속만 있었다. 아브라함 나이 백세 때, 사라의 나이 90세 때 드디어 이루어졌다. 한 명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그 이후로 누구든지 믿음만 가지면 신앙의 족보에 들어간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3:8)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몸에 할례가, 표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아니다. 몸의 표시가 아니다.

세례나 방언 또는 신유와 같이 받은 은사만 강조하는 사람과 바리새인이 다를 것이 없다.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가 없다면, 그의 신앙은 거짓이다. 쓸모 없기 때문에 땅에서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구원하실 수 있다. 구원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처럼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이 아닌, 그래서 모든 사람이 경멸하고 혐오할 수밖에 없는 나사로를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면 그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부자가 겉모양으로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고, 할례를 받고, 재산으로 떵떵거려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런 것들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변호가 되어주지 못한다. 스스로를 생각할 때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착각이다. 부자란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 중 물질의 은혜만을 누린 사람에 불과하다. 그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될 수는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물질 중 주인은 하나이다. 하나님과 세상 중 주인은 하나이다. 부자는 돈을 주인으로 섬겼기에 부자라는 이름을 들었다. 내가 듣기 원하는 이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을 들었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에도 영광스러울 수 있다.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언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할례만 원하였던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 집 문 앞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외면했던 것이 부자의 죄다. 부자가 자기 집 대문을 열기 원하였지만, 결코 마음의 문을 열기를 원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3. 손가락 끝에라도 묻혀주기를 바라는 부자를 도울 없는 이유는? (26)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오지도 못한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25)

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전철에서 실랑이를 하는 역무원과 장님을 보았다. 역무원이 장님을 강제로 끌고 내리려는 것이다. 너무 불쌍해서 왜 그러냐고 했다. 그랬더니 말이 가관이다. 이 사람이 정말로 가난한 사람인지 집으로 찾아갔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자기 집보다 훨씬 좋더란다. 이층 집에 살고, 행색도 보통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불쌍히 여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는 거짓으로 가난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우디에는 거지들이 늘어나고 있다. 직장이 없으면 나라에서 주는 주게 되는데, 생활하기에 남으면 남지, 절대로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직장에서 받는 월급보다도 더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마다 셀 수 없을 만큼 거지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매년 태풍으로 인하여 수십만 명이 다치고, 수 백억 원의 재산 피해를 입는다.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소리가 항상 있고,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누가 이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어느 누가 365일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살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부자가 그 위치에 오를 때까지 이 사람들이 도와준 것 없잖은가? 부자라서 해서 이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다 내놓고, 이 사람들을 위해 평생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잖는가?

죽은 후에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큰 구렁텅이가 있다. 이 간격이 있어서 부자는 나사로에게 가지 못했고, 나사로는 부자에게 갈 수가 없었다.

이 간격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있었다. 육체적으로는 자기 집 대문 앞에 있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음부의 간격만큼이나 떨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이 간격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있더라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부자가 나사로에게 갈 수 없었지만, 죽은 후에는 나사로가 부자에게 도저히 갈 수 없다.

부자는 죽어서야 나사로의 입장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배고파했는지, 목말라 했는지, 추워했는지.... 그가 부자일 때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옥에 가서는 자기가 누리던 그 모든 것을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 모두를 구제하라고 했는가? 하나님이 언제 우리에게 하루 24시간 모두를 드려 구제하라고 했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부자의 집 문 앞에 앉아있는 나사로를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 그 사람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버려지는 옷만큼, 버려지는 음식만큼이라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도와주라는 것이다. 낭비는 그래서 죄다. 심판 받을 이유이다.

 

4. 나사로를 살아있는 자들에게 보내면 소용이 있을까요? (29~31)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부자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날지라도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부자는 살아있는 동안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이 원망스러웠다. 기회가 있을 때 하지 못했음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미 자기에게는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그때 그의 마음에 제일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 자기 식구들이다. 자기의 삶과 별다를 것 없는 그들이기에 보나마나 지옥으로 올 것이다. 그들만이라도 천국에 가야 하지 않을까?

식구들이 모두 믿을 수 있다면, 그 방법은? 그렇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 그들에게 말을 한다면 믿을 것이다. 우리 식구 모두가 나사로의 죽음을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죽은 나사로가 부활하여 복음을 전한다면 믿을 것 아닌가?

아브라함에게 특별히 간구한다. 나사로가 식구들에게 가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형제 다섯이 모두 이곳으로 오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필요 없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이미 모세와 선지자가 있기 때문이다. 가끔 심심찮게 만나지는 사람이 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들의 간증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성경 한 구절보다 귀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고, 목회자가 있다. 이미 그들을 통하여 증거된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 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10:13~14)

암에 걸린 이가 있다. 식구들은 벌써부터 그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점점 자신의 죽음을 느끼면서 변하였다. 장례식 용 사진 큰 것을 일부러 찍고, 집도 팔아 자식들에게 분배하고, 빚 받을 것까지 자식들에게 다 일러주었다. 철저하게 준비를 하였다.

그때부터는 또 열심히 성경을 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링거를 맞느라 성경을 들 수가 없었고, 성경 통독 테이프이라도 들으려 했는데 녹음기가 마침 고장이 나서 들을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등바등 대다가 결국 일주일 후에 죽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한때 모 회사가 내건 슬로건이다. 십년이 문제가 아니다. 한번의 선택으로 인해 우리의 평생이 좌우된다. 아니, 죽음 이후의 삶까지 좌우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택을 하지 못함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에서는 After라는 것이 있지만, 죽어서도 있던가?

기회를 잃어버리는 그 순간이, 선택할 수 없는 그 순간이 반드시 우리에게 온다.